독일 현대미술가 데이비드 레만(41)은 비교적 밝은 색깔인 노란색을 즐겨 사용한다. 마치 어린 시절 기억처럼 희미하게 피어나는게 좋아서다. 캔버스의 리듬을 잡아주는 장치로도 노란 물감을 자주 활용한다. 예를들어 캔버스 바탕을 노란색으로 버무린 뒤 여기에 안료를 뿌려 점차 색을 지워가며 전체 구도와 균형을 모색한다. 중부 유럽 회화의 전통에 뿌리를 둔 ‘겹회화(layered painting)‘기법에 미국 추상표현주의에서 받은 깊은 영감을 덧씌워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그래서 그의 붓질은 아슬아슬하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거의 광폭한 에너지로 복잡하게 얽히기도 한다.
인문학적 통찰력도 캔버스 곳곳에 깊숙이 집어넣는다. 미술을 시작하기 전 2년간 공부한 철학과 미학을 작품의 ’젖줄‘로 여겼다. ’인문학 숲‘으로 여행하며 보여주고 싶은 세상과 전하고 싶은 마음을 붓끝으로 잡아낸 그의 작품들은 미국 화가 엘스워스 켈리와 케네스 놀랜드의 색면 추상을 떠올리게 한다.
유럽식 표현주의 양식에 북미 추상을 접목한 레만이 모처럼 서울을 찾아 삼청동 초이앤초이갤러리와 청담동 호리아트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동시에 연다. 김윤섭 아이프미술경영 대표가 기획해 다음달 24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회는 2010년대 작품부터 근작, 드로잉까지 42 점을 선보이는 아시아 최초의 개인전이다.
우선 삼청동 초이앤초이 갤러리는 전시 주제를 ‘사랑을 또다시 믿는다(I believe in love again)’로, 호리아트스페이스는 '사랑은 죽음보다 뜨겁다(Love is hotter than death)’로 잡아 현대인의 사랑에 대한 특별한 단상을 시각예술로 보여준다. 독일 현대미술의 최근 트렌드를 주도한 레만의 작품을 통해 시대를 앞서간 작가 정신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다.
레만은 자신의 작품을 “현대사회를 관통한 순간의 경험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했다. “젊은 시절 독일 화단을 지배한 표현주의가 안겨준 일말의 허무감을 극복하려 새로운 방식을 찾았다”는 그는 현란한 북미식 액션페인팅을 더해 복잡하게 얽힌 현대인들의 의식을 실타래처럼 풀어냈다.
베를린 국립 예술대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한 레만은 2016년 브란덴부르크 연방주의 젊은 예술가상 최우수 수상자로 뽑혔다. 차세대 미술가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본을 비롯해 비스바덴, 함부르크, 켐니츠의 시립미술관 순회 그룹전을 거치면서 국제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김윤섭 아이프미술경영 대표는 "레만은 형식이나 기법,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로 회화와 드로잉을 넘나드는 조형 언어를 구사한다"면서 "특유의 젊은 감성으로 독일 현대회화의 새 지평을 연 작가"라고 소개했다.
레만은 요즘도 작품의 자양분을 채집하려 인문학적 성찰에 여념이 없다. 문화와 국경의 경계를 뛰어넘어 문학, 영화, 사진, 음악, 미술사, 정치, 철학 분야에서 소재를 마치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한 프로메테우스, 가수 PJ 하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공상과학 소설 ‘듄’, 영화 ‘프리 윌리’ 등 에 담긴 주제나 인물을 작품 소재로 활용한다.
레만은 더구나 소위 고급 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끊임없이 생산되는 이미지를 직면해 온 인간에게 이렇게 생산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어떠한 서열을 부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문학적 감흥을 통해 느낀 현대인의 다채로운 감성을 빈부, 서열, 지위와 관계없이 회화적 키치와 시적 이미지로 재생한다는 얘기다.
서사적 스토리와 색채에 사색과 명상의 여운이 더해진 그의 작품은 자연스럽게 인간과 시간, 공간, 촉각(붓질)의 네 갈레로 읽혀진다. 레만이 그동안 일관되게 추구한 작품 제목을 자주 ‘분산(dispersion)’으로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가는 “분산은 동일하고 균등한 시간성을 다시금 동일하고 균등한 공간성으로 대체시키면서 자신의 생각과 형태, 색채, 공간, 시간을 일체화시키려는 탐색”이라고 설명했다.
데이비드 레만의 개인전을 열고 있는 서울 청담동 호리아트스페이스. 사진=호리아트스페이스 제공 |
주제는 같아도 초기와 지금의 작품은 많이 다르다. 초창기 엄격한 기하학적 패턴을 고수한 그의 작품은 2010년대 들어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이 선명해지고 색면이 서로 겹치며 다채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색감도 예전엔 노란색을 썼지만 최근에는 빨강, 청색 등 다양하게 계열을 즐겨 사용한다. 손에 잡힐 듯하지만 잡히지 않는, 마치 하늘의 뭉게구름처럼 화면은 그렇게 전시장에 떠 있다. 수십 년 세월을 갈고 닦은 그의 붓질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미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