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집이 불 켜진 아파트 위로 상현달이 떠 있다. 밤 풍경이 펼쳐진 창 아래엔 책을 읽다 잠이 든 여성이 누워 있다. 달빛에 환한 얼굴 뒤쪽엔 또 하나의 어두운 얼굴이 잠들었다. 비현실적으로 크게 그려진 방 안의 꽃들은 무채색이다. 낯과 꽃은 색을 잃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초이앤초이 갤러리가 개최한 독일 중견 화가 아민 보엠(50) 개인전에 전시된 '속삭이는 바람'은 이런 어둠으로 오늘날의 불안을 표현한다.
독일 신표현주의 주요 화가 중 한 명인 외르크 임멘도르프의 제자인 아민 보엠은 스승처럼 화면이 사회 비판적이기도 하다.
그는 어둠 속 뒷골목의 부랑자들, 이들을 향해 전조등을 밝게 켠 스포츠카, 탐욕스러움이 물씬 묻어나는 왜곡된 인물 등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또한 일상적인 폭력과 혐오에 무감각해지고 소셜미디어에 중독된 듯한 사람들의 얼굴을 동물의 그것으로 표현하는 다소 유치한 비유도 사용한다.
이번 개인전을 위해 방한한 아민 보엠은 최근 전시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그림은 예수의 십자가형을 그린 야경화의 전통과 연결된다고 설명했다.
전시에 선보인 작품들 다수는 이처럼 밤을 그린 연작들도 비극의 미학을 담으려 했다.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특징은 고정관념이 촉발한 양극화"라며 "그림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전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양극화로 계급 간 투쟁이 극에 달했다"고 진단하는 작가는 자본주의의 변화가 임박했음을 그림을 통해 말한다.
그의 회화에는 전구, 전조등, 네온사인 등 인공적 불빛과 야행성인 고양이, 빛을 가리는 커튼과 같은 밤의 모티브가 등장하며 대중문화와 문학 등도 담아낸다.
그러나 그는 "그림의 주제보다 그림 자체가 더욱 중요하다"면서 "그림은 흥미로워야 하며 결국 중요한 것은 그림 표면의 질감"이라고 강조했다.
영국의 대표적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이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언급한 인터뷰에 감명을 받았다는 아민 보엠은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꾸준히 개발해왔다고 밝혔다.
그는 베이컨처럼 캔버스에 밑칠하지 않고 바로 채색한다고 설명했다. 베이컨은 초기에 새 캔버스를 살 돈이 없어서 캔버스의 뒷면에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아민 보엠은 주로 캔버스에 목탄으로 스케치하고 유화 미디엄을 많이 섞어 묽게 만든 물감으로 칠한다. 목탄과 섞인 물감은 지저분해지면서 한 겹만 발라도 어두운 분위기를 무겁지 않게 담아낸다. 속도감 있는 붓질과 천을 잘라 붙이는 콜라주 기법 등으로 화면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밤 풍경과 두 인물을 중첩 시킨 초상화 연작 등 유화 20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 기간은 10월 9일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