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GLISH]
Lee Taesoo’s sculptural depictions of stones and iron beams seem heavy enough to fall through the floorboards at any moment. In actuality, these hefty pieces are made out of polystyrene, merely weighing a few kilograms. By creating objects that seem heavy, Lee critiques the way in which our society measures success - based on the superficial value of ownership (to have) rather than the intrinsic value of existence itself (to be). Just as an object that seems heavy is near weightless in reality, we are invited to reexamine what it means to have value as human beings in today’s society, and whether we have forgotten our true humanity and autonomy, distracted by the surface value of possession. Lee’s work makes us carefully examine the properties of an object beyond what is visible, and as such, we are prompted to take a moment to reflect on societal issues that are often left unseen and neglected, as well as on how we prioritize our own values in life.
[KOREAN]
이태수의 작업은 특유의 극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우리의 보편적인 이해와 인식을
배반한다. 땅이 꺼질 것처럼 무겁고 거대한 바위와 철근은 유리잔 위에 지탱되고, 중력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져야 마땅한 물체들은 공중에 고정되어 우리의 눈을 혼란스럽게 한다. 스티로폼과 포맥스의 구조로 제작된 이태수의 돌 앞에서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형태, 현상, 규율들이 무너지며 진실과 허구의 경계는 그 만큼 더욱 줄어든다. 결국, 현실의 실체는 절대적이지 않다.
배반한다. 땅이 꺼질 것처럼 무겁고 거대한 바위와 철근은 유리잔 위에 지탱되고, 중력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져야 마땅한 물체들은 공중에 고정되어 우리의 눈을 혼란스럽게 한다. 스티로폼과 포맥스의 구조로 제작된 이태수의 돌 앞에서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형태, 현상, 규율들이 무너지며 진실과 허구의 경계는 그 만큼 더욱 줄어든다. 결국, 현실의 실체는 절대적이지 않다.
작업의 주제가 되는 ‘돌‘또한 수 천 수 만년을 견디며 영원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고 이태수의 돌은 더욱 그렇지 아니하다. 100 년이 채 안 되는 수명이 주어진 우리에게
웅장하고 한결 같은 바위는 변화를 모르는 듯하다. 그러나 비, 바람, 태양 등 수많은
환경적 요소들로 인해 몇 세기를, 몇 천년기를 거쳐 변화하고 가루가 된다. 돌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다른 것이다. 절대적이고 모두에게 평등하다 생각되는 시간 또한 이렇게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배반한다.
않고 이태수의 돌은 더욱 그렇지 아니하다. 100 년이 채 안 되는 수명이 주어진 우리에게
웅장하고 한결 같은 바위는 변화를 모르는 듯하다. 그러나 비, 바람, 태양 등 수많은
환경적 요소들로 인해 몇 세기를, 몇 천년기를 거쳐 변화하고 가루가 된다. 돌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다른 것이다. 절대적이고 모두에게 평등하다 생각되는 시간 또한 이렇게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배반한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허구성을 부각하는 이태수의 작업이 시간에 접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진척이라고 볼 수 있다. 회화, 사진, 조각 모두 현실의 일부를 시각적으로
복제한다는 의도성을 지니며, 재현되는 이 현실의 한 조각은 작가가 작품을 의도한 특정 시간을 함께 포착한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의 한 장면을 왜곡 없이 담는 사진작업 또한 카메라의 셔터가 눌리기 전까지 많은 움직임과 연출의 과정을 거치며, 기념비적
자연스러운 진척이라고 볼 수 있다. 회화, 사진, 조각 모두 현실의 일부를 시각적으로
복제한다는 의도성을 지니며, 재현되는 이 현실의 한 조각은 작가가 작품을 의도한 특정 시간을 함께 포착한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의 한 장면을 왜곡 없이 담는 사진작업 또한 카메라의 셔터가 눌리기 전까지 많은 움직임과 연출의 과정을 거치며, 기념비적
조각상으로 제작된 많은 조각 작품들 또한 시대정신을 담은 듯하지만 이렇게 기록된 그
시대의 형태는 종종 다양한 목적을 위한 왜곡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시간의 유동성과
주관성을 작업에 반영하기 위한 시도는 많은 예술가들의 손을 거쳐왔다. 인상주의적
붓터치를 통해 역동적인 발레리나들의 몸짓을 화폭에 담은 에드가 드가, 추상적인
사선과 제스처를 통해 형태가 없는 움직임을 가시화한 바실리 칸딘스키, 장노출 기법을
통해 시간의 변화를 사진으로 보여준 만 레이 등 선명하고 깔끔한 순간의 포착을
거부하고 흐릿함과 혼란을 수용할 때 현실의 또 다른, 어쩌면 더욱 진실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시대의 형태는 종종 다양한 목적을 위한 왜곡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시간의 유동성과
주관성을 작업에 반영하기 위한 시도는 많은 예술가들의 손을 거쳐왔다. 인상주의적
붓터치를 통해 역동적인 발레리나들의 몸짓을 화폭에 담은 에드가 드가, 추상적인
사선과 제스처를 통해 형태가 없는 움직임을 가시화한 바실리 칸딘스키, 장노출 기법을
통해 시간의 변화를 사진으로 보여준 만 레이 등 선명하고 깔끔한 순간의 포착을
거부하고 흐릿함과 혼란을 수용할 때 현실의 또 다른, 어쩌면 더욱 진실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딱딱하고 견고한 돌이 전시장 벽으로 스며들며 그 형태를 잃고 사라지는 것 또한 돌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와 대립하는 듯하다. 하지만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고
‘경험‘을 통해 구체화되는 시간을 돌의 관점과 경험으로 표현함으로써 이태수의
Throwing Stone 시리즈는 오히려 현실과 맞닿아 있다.
글 – 김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