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잘 그린다.”
정재호(52) 작가의 그림 앞에 서면 모두 똑같은 탄성을 터트린다. ‘사실적 묘사’, ‘사진 같은’ 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작품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의 풍경엔 그 이상의 것들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질구질한 대기감 마저 그대로 담으려 노력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재개발의 막바지 단계에 이른 세운상가와 그 주변의 풍경이 대상이다. 수년간 같은 장소를 반복해 그려오고 있다. 처음엔 ‘서울의 한 가운데 존재하지만 가장 낙후된 곳’, ‘고도 성장기를 상징하는 기념비적 공간’, ‘지금은 사라지는 곳’이라는 장소성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직접 걸어다니고, 보고, 사진찍고, 그리자 이같은 거대한 의미는 사라졌다. 대신 ‘어떻게 하면 제대로 그릴 수 있는가’하는 회화적 재현의 문제가 더 크게 다가왔다.
정재호는 사진을 찍는다. 오래된 소니 ‘똑딱이’다. 걷다가 남기고 싶은 것들,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찍어놓는다. 그리고 작업실로 돌아와 사진을 보며 그 풍경을 재현한다. 문제는 카메라 렌즈와 인간의 눈이 같지 않다는 데 있다. 렌즈는 거리감에서, 색감에서, 질감에서 인간의 눈과 다른 기록을 내놓는다. 일종의 왜곡이다. “아무리 많은 수의 사진을 찍더라도 실제 풍경을 대면했을 때 생생함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다시 작업실을 나와 같은 장소에 가면 그린 그림과 이곳(대상)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추가로 더 사진을 찍는다. 여러장 사진을 두고 각기 다르게 표현된 색과 빛을 따져가며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여러겹 덧 씌워가며 수정에 수정을 더해야 겨우 ‘눈으로 보는 실재감’에 한 뼘 더 가까워진다. 해체와 재조립의 반복이다.
정재호, 동대문 아파트, 2022, 캔버스에 오일, 194 x 130.3 cm.[초이앤초이 갤러리 제공] |
눈 내린 세운상가 주변의 풍경과, 비온 뒤 을지로, 지금은 다 허물어져 공터가 된 예지동의 풍경은 끝없는 회의와 수정 속에서 탄생했다. 빈 옥상을 채우는 장마비와 초여름의 눈부신 햇살도 마찬가지다. 동대문 아파트 1층에서 하늘을 올려다본 시선엔 외부와 단절된 적막함 마저 흐른다. 같은 대상도 해사하게 표현하는 ‘인스타 감성’의 최근 트렌드와는 거리가 있다.
“그리면 그릴수록, 내 재능의 한계를 알게 된다.” 작가는 고백한다. 복도식 아파트에 볕이 들때 그 그림자의 색감이 층마다 다르고, 회색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보라빛에 가깝다는 것을 포착해 내는 작가의 토로는 어딘가 이질적이다. “어떤 풍경을 반복적으로 그리면 더 잡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가까운 사람 얼굴일수록 정확하게 재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풍경의 세부를 알아갈수록 하나의 인상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세부를 모두 다시 그리는 수 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전시의 제목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은 작가가 20여년 전 그렸던 작업에서 따왔다. 중곡동 한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시절, 한강 쪽으로 펼쳐진 전망을 그린 그림이다. “조망이라는 풍경의 유사점도 있으나, 그보다 과거로부터 지속해온 어떤 마음의 상태를 다시 바라보게 됐다.”
오랜기간 그려온 세운상가는 이제 곧 사라진다. 다음 타깃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과거에 파묻힌 것을 재발굴하는 테마는 당분간 유효하다. 그림으로 기록한 세운상가의 찐 풍경은 2월 25일까지 만날 수 있다. 서울 종로구 팔판길 초이앤초이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