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폭의 풍경화가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옛것과 새것, 사라질 것들과 살아남을 것들이 공존하는 도시의 풍경. 지평선을 이루는 빌딩 숲의 가장 왼쪽에 우뚝한 건물은 두산타워입니다. 을지로 대림상가에서 동쪽을 바라본 풍경이죠. 하늘 가장자리에 붉은빛이 감도는, 이제 막 동이 터오는 새벽녘에 대림상가 위에 올라가서 바라본 을지로 일대. 무엇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작가는 거기서 본 풍경을 세밀하게 캔버스에 옮겼습니다.
정재호 작가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습니다. 대학에서도 동양화를 가르치고 있죠. 하지만 작품은 캔버스에 유채 물감으로 그렸습니다. 풍경을 그리려면 화면에 공간을 구축해야 하는데, 동양화 재료로 그리는 게 무척 어렵게 느껴졌다는군요. 그럼 재료를 바꿔봐야겠다 해서 시작한 것이 바로 유화였습니다. 작은 그림부터 꾸준히 그리다 보니 가능성이 보였고, 그래서 지금까지 꾸준히 유화를 그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없는 풍경입니다. 철거와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정재호 작가의 그림은 풍경이 거기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작가는 대체 어떤 연유로 을지로의 사라져가는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일까요.
청계천 복원이 한창이던 2003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물 위를 걷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기획전이 열렸습니다. 청계천 복원을 바라보는 미술인들의 다양한 시각을 보여준 전시였죠. 정재호 작가는 이때 처음 청계고가 일대를 그렸고, 그 기운을 '오래된 아파트' 연작으로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리면서는 세운상가에서 두산타워 쪽을 바라보는 대형 작품을 선보였죠. 그때부터 세운상가 일대를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20년 을지로 상업화랑에서 '창과 더미'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면서 을지로 작업의 비중이 자연스럽게 커지게 됩니다.
전시장을 돌다 보면 세운상가나 대림상가에서 동쪽, 그러니까 두산타워를 바라보는 그림이 많습니다. 실제로 작가는 세운상가 일대를 걸으면서 같은 방향을 여러 시점에서 본 풍경들을 그때그때 다른 느낌으로 화폭에 옮겼습니다. 어떤 풍경이라도 사람이 사는 공간이기에 조금씩은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그림을 그리고 난 이후에 다시 가보니 아예 사라져버린 풍경도 있었죠.
작가가 그런 풍경을 한 땀 한 땀 공들여 그리는 이유는 의외로 소박합니다. 보이는 그대로의 풍경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는 겁니다. 대개 철거나 재개발 지역을 예술로 표현할 때는 으레 도시화, 근대화, 재개발의 그늘과 도시 재생과 같은 묵직한 사회적 의제를 의식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특히 비나 눈이 오면 작가는 열 일 제쳐두고 그 장소로 다시 달려가서 사진에 담았습니다. 그 덕분에 작가의 작품에는 계절과 시간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죠. 예술가가 '시대의 기록자'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어떤 그림 속 풍경은 이제 그림으로만 남은 탓에 풍경도, 그림도 일종의 타임캡슐인 셈입니다.
작가 노트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이곳은 쇠락하여 사라지는 곳이기도 했지만, 수많은 세부가 나와 다름없는 삶의 부침을 겪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을 그림으로 그리는 과정은 이전의 인식을 스스로 부수고, 나와 같은 삶을 겪는 대상으로서 다시 그 세부들을 만지고, 일으켜 세우는 일이 되었다."
정재호 작가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습니다. 대학에서도 동양화를 가르치고 있죠. 하지만 작품은 캔버스에 유채 물감으로 그렸습니다. 풍경을 그리려면 화면에 공간을 구축해야 하는데, 동양화 재료로 그리는 게 무척 어렵게 느껴졌다는군요. 그럼 재료를 바꿔봐야겠다 해서 시작한 것이 바로 유화였습니다. 작은 그림부터 꾸준히 그리다 보니 가능성이 보였고, 그래서 지금까지 꾸준히 유화를 그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정재호 〈마지막 겨울 IV〉, 2022, 캔버스에 오일, 162 x 112cm
이제는 없는 풍경입니다. 철거와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정재호 작가의 그림은 풍경이 거기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작가는 대체 어떤 연유로 을지로의 사라져가는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일까요.
청계천 복원이 한창이던 2003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물 위를 걷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기획전이 열렸습니다. 청계천 복원을 바라보는 미술인들의 다양한 시각을 보여준 전시였죠. 정재호 작가는 이때 처음 청계고가 일대를 그렸고, 그 기운을 '오래된 아파트' 연작으로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리면서는 세운상가에서 두산타워 쪽을 바라보는 대형 작품을 선보였죠. 그때부터 세운상가 일대를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20년 을지로 상업화랑에서 '창과 더미'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면서 을지로 작업의 비중이 자연스럽게 커지게 됩니다.
정재호 〈모습〉, 2022, 캔버스에 오일, 194 x 130.3 cm
전시장을 돌다 보면 세운상가나 대림상가에서 동쪽, 그러니까 두산타워를 바라보는 그림이 많습니다. 실제로 작가는 세운상가 일대를 걸으면서 같은 방향을 여러 시점에서 본 풍경들을 그때그때 다른 느낌으로 화폭에 옮겼습니다. 어떤 풍경이라도 사람이 사는 공간이기에 조금씩은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그림을 그리고 난 이후에 다시 가보니 아예 사라져버린 풍경도 있었죠.
작가가 그런 풍경을 한 땀 한 땀 공들여 그리는 이유는 의외로 소박합니다. 보이는 그대로의 풍경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는 겁니다. 대개 철거나 재개발 지역을 예술로 표현할 때는 으레 도시화, 근대화, 재개발의 그늘과 도시 재생과 같은 묵직한 사회적 의제를 의식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
작품 앞에서 설명하는 정재호 작가
"흔히 풍경화라고 하면 아름다운 풍경을 재현하거나 감성적인 차원에서 재현하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이 지역(을지로 일대)의 풍경이 그렇게 그려진 적은 없었던 것 같더라고요. 계속 보다보니까 저한테는 이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지는데, 여기를 제대로 작업한 사진도 별로 없고, 대부분 사회적 코드로 접근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코드 말고 그냥 우리가 풍경화에서 기대하는 풍부한 감수성의 측면이라든지 볼륨감 있는 역사적인 풍경화 속의 모습들, 그런 풍경화로서 이 풍경들을 다루고 싶다... 그래서 제 목표는 풍경화의 대상으로서 이 장소를 끌어올리고 싶다는 욕구, 또 하나는 여기를 사진이 아닌 회화를 통한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
정재호 〈서울의 눈〉, 2023, 캔버스에 오일, 200 x 150cm
특히 비나 눈이 오면 작가는 열 일 제쳐두고 그 장소로 다시 달려가서 사진에 담았습니다. 그 덕분에 작가의 작품에는 계절과 시간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죠. 예술가가 '시대의 기록자'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어떤 그림 속 풍경은 이제 그림으로만 남은 탓에 풍경도, 그림도 일종의 타임캡슐인 셈입니다.
작가 노트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이곳은 쇠락하여 사라지는 곳이기도 했지만, 수많은 세부가 나와 다름없는 삶의 부침을 겪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을 그림으로 그리는 과정은 이전의 인식을 스스로 부수고, 나와 같은 삶을 겪는 대상으로서 다시 그 세부들을 만지고, 일으켜 세우는 일이 되었다."
■전시 정보 제목: 정재호 개인전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기간: 2023년 2월 25일(토)까지 장소: 초이앤초이 갤러리 서울 (서울시 종로구 팔판길 42) 작품: 유화 21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