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실재하는 나의 모습입니다.”
그의 두개골로 보이는 해골 하나가 그려진 큰 그림이 가운데 있다. 그 양옆에 눈을 감은 작가의 얼굴 두면을 각각 담은 작은 그림이 대칭을 이룬다. 작은 그림들 속엔 타오르는 촛불과 정자 바위 뒤쪽에서 눈 감고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이 도사리고 있다. 촛불과 얼굴 사이엔 불 꺼진 등대, 정자와 얼굴 사이엔 바위 위의 늙은 소나무 가지가 보인다. 온통 붉은빛으로 가득한 화면 속에서 펼쳐진 이 풍경과 인물은 리넨 천에 붉은 빛 유화물감만으로 그려서 표현한 것이다. 묘사가 정밀하고 핍진해 사진을 보는 듯하다.
작가는 빨간 그림 세개가 내걸린 벽면을 가리킨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친숙하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 풍경은 지금 한반도의 현실과 자연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을 작가 스스로 떠올리면서 그린 결과물이다. 2000년대 이후 분단된 한반도에 펼쳐진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현실적 풍경을 ‘붉은 산수’라는 특유의 작법으로 그려온 이세현 작가는 신작 소품연작 ‘빨강을 넘어’에서 자신의 붉은 자화상을 강렬한 필치로 화폭에 집어넣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 속 사색하는 인간의 모습을 띠지만, 실제로는 작가의 의식 속에서 고뇌하면서 읽어내는 이땅 공간과 그 속을 거니는 자신의 내면을 담아내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이런 생각이 거듭되어 변형되고 직조된 조선후기 진경산수의 풍경을 21세기에 작가는 현실적 공간 속에서 새롭게 변주해내고 있다.
이세현 작가의 신작 3점은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 가는 길목에 있는 초이앤초이갤러리 서울의 3층 전시장에서 감상할 수 있다. 지난달부터 열리고 있는 국내외 작가 41인의 단체기획전 ‘휴먼(HUMAN)' 의 전시현장에서 주목을 받는 신작 출품작들 가운데 하나다.
쌍둥이 자매로 독일 쾰른에도 거점을 두고 유럽과 한국을 오가면서 갤러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최선희 최진희 공동대표가 만든 전시다. 두 기획자는 세계적인 명망을 얻은 유럽의 대가들과 한국의 중견 작가, 소장·신예작가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작품을 섭외하는 발품을 들였다. 전시 제목처럼 작품들의 내용 또한 인간에 대한 것이다. 작가들 자신이 어떤 정체성의 인간인지, 자신이 생각하는 인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 등을 표현한 회화, 조형물, 영상, 초상, 추상회화 등의 다양한 소품들을 3층의 전시장에 두루 망라해 내걸고 흩어놓았다.
데이비드 레만의 2022년작 유화 ‘더 마스크(The Mask)’.
한반도의 현실 속에서 고뇌하는 작가와 자연의 풍경이 어우러진 이 작가의 작품 앞에는 작가 주변에서 채집한 일상사물의 오브제들을 합성수지, 금속, 나무 등으로 재현하고 이를 수집하려고 움직이는 몸 자체를 본떠서 조합한 다니엘 피르망의 조형물이 놓였다. 채집하고 수집하는 행위야말로 인간의 사회와 문명을 일으키는 또 다른 기반이라는 것을 일러주는 작품이다.
안료의 물감이 툭 터진 얼룩의 흔적으로 눈동자를 표현한 데이비드 레만의 반추상적 인물화와 오리 앞에서 트럼펫을 부는 아이와 알몸의 남자가 배가 불룩한 암고양이를 들고 있는 파울 프렛저의 인물군상화들은 우리 삶에서 인간적인 단면 혹은 순간들을 생각하게 한다.
파울 프렛저가 올해 그린 유화 ‘선율(Tune)’.
세월의 풍상을 머금은 노년 남자의 얼굴을 담은 원로작가 권순철의 초상화와 연인 남성의 바지춤에 손을 넣은 여인의 독한 인상이 강렬한 안창홍 작가의 표현주의적 그림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인체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포착한 매튜 스톤의 첨단 인물화, 표정없는 알몸 남자들의 군상을 통해 성정체성에 대한 감각적 성찰을 일깨우는 백향목 작가의 작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개 3~10호 정도의 소품들이지만, 70호에서 120호까지 큰 작품들도 같이 배치한 덕분에 관람에 리듬감이 느껴지는 것도 특징이다. 30일까지.